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사령관 스타크래프트가 확장팩도 아직 안 나왔던 옛날옛적에, 자영업자 부모님이 회계용으로 샀던 컴퓨터에 부록으로 딸려온 게임이 있었습니다. 바로 듄 2000이었지요. 레드얼럿 1편 엔진 기반으로 듄 2를 리메이크한 그 게임은 저뿐만이 아니라 아버지도 뜬 눈으로 밤을 지새며 캠페인을 달리게 만들었습니다. 송충이 눈썹이 좌우로 우뚝 솟구친 아트레이드 멘타트 아저씨가 스파이스가 든 커피를 권하는 인게임 컷씬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우리 부자지간엔 이런 농담을 합니다. "스파이스 커피 한 잔 하쉴?" 지금의 겜돌이 아들을 만들게 된 결정적 계기를 본인이 제공했음을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은 어머니는 '그때 내가 왜 그놈의 듄을 사왔는지' 지금도 개탄하십니다. 겜돌이 아들은 자연스럽게 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라는 것도 접하게 되었고, PC통신이 대세이던 시절 천리안 커맨드 앤 컨커 포럼에 가입한 이래로 C&C 시리즈는 자연스럽게 제 인생의 한 축이 되었습니다. 그런만큼 이 게임은 제게 각별합니다. 철컹철컹 굉음을 내며 건물로 변신하는 MCV의 모습, 날먹을 하러 달려가는 엔지니어, 탱크에 깔려죽는 보병들, 프랭크 클리페키 아저씨의 끝내주는 배경음악까지 유년시절의 신나는 기억을 세련되게 되살려낸 게임이니까요. 커맨드 앤 컨커의 화려한 부활 앞서 소개한대로 이 게임은 흘러간 장르에 보내는 연가입니다. RTS 장르가 사실상 사멸해가는 상황에서 C&C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사무치던 친구들은 끝없이 이 게임을 되살려내려 노력했습니다. 웨스트우드의 후신인 페트로글리프가 만든 게임들이라던가 혹은 인디게임 씬에서도 여러 시도가 있었지요. 미안한 말이지만 하나같이 본판만 못했습니다. 재탕 삼탕을 하다못해 맹물 수준이 되어버린 추억이란 사골국에 빨대만 꽂아놓은 수준의 게임이 난립했지요. 그런 상황에 꽤나 그럴싸한 비주얼의(미션 간 시네마틱 컷씬부터 제법 심상찮았던) 게임이 등장해서 이 바닥의 망자들을 설레게 하는데… 바로 이 게임, 템페스트 라이징이었지요. GDI를 연상케하는 지구방위군(GDF)과 레드얼럿의 소련을 연상케하는 템페스트 연합, 거기다 제3세력(타이베리움 사가의 스크린 같은)을 적당히 섞어서 내놓은 게임의 설정부터가 본디부터 이 장르를 즐겨온 사람들에겐 친숙하기 그지없는 배치입니다. 직접 게임을 해보면 익숙하다못해 정말 반갑기 그지없는 수준의 구성들이 오래 입었던 옷처럼 찰싹 달라붙습니다. 발전소 짓고 배럭 짓고 엔지니어 뽑아서 달려가고 자원 옆에 정제소 지으면 하베스터가 털털털 굴러가서 바닥에 깔린 자원을 호로록챱챱 잡아먹고 돌아오는 그 모든 모습이 정겹습니다. 그 모든 것이 언리얼 엔진 5라는 최신 기술로! 복셀엔진으로 만들어진 타이베리안 선에서 지형이 포탄맞고 내려앉는 걸 보면서 감탄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의 이 화려한 그래픽을 보니 흘러간 세월이 참으로 야속합니다. 물론 단순히 그래픽만 바뀐 수준이라면 이 게임이 이렇게 좋은 평가를 듣고 있지는 못하겠지요. 생각보다 연구를 많이 한 게임 설계 건물을 짓고 보병, 차량, 항공기 등을 생산해가며 교전을 하고 유닛 상호간에 약간의 상성관계가(딱총은 차량을 못 잡지만 보병을 잘 잡고, 포는 보병보다 차량을 잘 잡는다는 등의) 존재한다는 구조 자체는 여타 C&C 시리즈와 동일합니다. 그런데 이 게임은 유닛들이 상당히 긴 TTK를 가지고 있어서 교전 상황에 유닛들이 순식간에 녹아버리는 상황은 잘 발생하지 않습니다. 손이 어지간히 느린 사람이라도 다소간 컨트롤을 할 여지가 있어요. 이 장르의 확고한 지지자들이 늙어서 반응속도가 예전같지 않다는 점을 잘 고려했다고 봅니다. 울적한 일이지만…. 또한 진영 고유의 컨셉을 C&C 시리즈보다 보다 확고하게 잡았습니다. 예를 들면 GDF는 단일 유닛의 성능은 그닥 강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들은 정보전에 컨셉을 맞춘 현대전 군대라는 컨셉을 들고 나왔고, 이에 따라 유닛들이 컨셉에 부합하여 네트워크전에 강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어느 유닛이 표식 탄환으로 적을 핑 찍어주면 본래 사거리보다 훨씬 먼 곳에서(마치 3세대 전차의 헌터-킬러 기능처럼) 더 빠른 속도로 사격을 하는 전차라던가. 통신 효과를 받으면 차량이 더욱 빠르게 움직인다던가. 유닛들을 조합해야하고 손도 많이 가지만 그만큼의 리턴이 있는 진영 컨셉을 가지고 있습니다. 템페스트 연합의 경우는 레드얼럿 소련군 같은 컨셉으로 단일 유닛들이 각각의 성능에 특화된 좀 더 직관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차는 튼튼하고 포가 쎕니다. GDF가 드론 조종병이 쿼드콥터 드론을 띄워서 차량을 터뜨리는 아주 복잡하기 짝이없는 짓을 하는 동안, 연합은 미사일 보병이 미사일을 직접 슝슝 쏩니다. 간단하지요. 유닛의 액티브 스킬도 거의 없고 손 갈 일이 별로 없는 간단한 구성입니다. 하지만 연합은 유닛 대신 기지 운영을 좀더 신경써서 해야합니다. 발전기를 과부하시켜서 그 영향을 받는 생산 건물들의 성능을 올려준다던가(그동안 건물 피가 좍좍 나가지만), 본진 건물에서 유닛을 빨리 뽑을지 자원을 많이 먹을지 고른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이런 차별적인 진영 운영은 타 게임이라면 영웅 유닛이라고 불릴 법한 특수한 보병(공작원, 특기병) 및 '교리' 개념을 통해서 심화됩니다. 주변의 아군 차량들에게 공격속도와 사거리 버프를 뿌리면서 핑 찍은 적을 좀 더 아프게 때리게 해주는 통신장교라던가, 적 차량을 아주 맛깔나게 후려칠 수 있는(자멘 켈 생각나는) 대차량 저격병이라던가 혹은 그걸 또 카운터치는 보병의 사신, GDF의 저격수라던가, 주변 사방의 보병 유닛들에게 힐을 뿌리는 폭동 진압 의무관 등등. 예전 C&C 시리즈의 특수 보병이 건물을 한방에 터뜨리고 보병 상대로 사신처럼 군림하는 원맨아미였다면 템페스트 라이징의 특수 보병은 부대를 지원하는 개념으로써 게임 운용의 묘를 살려주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리는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시리즈를 즐긴 사람들이라면 익숙할 만한 내용입니다(실제로 영문명 독트린이고). 일종의 스킬트리에 가까운 시스템이지요. 총 3개 트리 18개의 선택지 중에서 딱 11개만 고르게끔 되어 있는데, 유닛의 성능에 큰 변화를 가지고 오게끔 되어 있습니다. 드론을 주로 이용한다면 '파괴된 드론이 좀 더 빨리 재보충되게' 혹은 '드론이 비전투상황에 클로킹했다가 공격 시작하면 좀 더 세게 때리게' 하는 스킬들을 찍거나 하겠지요? 그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소해보이지만 이런 적절한 변주로 인해서 기존 C&C류 게임에 비해 훨씬 풍성한 게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위 '맘탱 10대 모아서 러시가세요' 류의 전략이 심지어 싱글 캠페인에서조차 쉽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이 오래된 장르의, 재탕 삼탕을 하다못해 골수를 쪽쪽 빨아먹으면 이제 맹물밖에 안 나올 것 같은 닳고 닳은 구조에서 이런 재미있는 변화를 이끌어 낼 줄은 몰랐습니다. 잘 만들었어요. 나머지 요소들 이게 무슨 어마무시한 트리플A급 게임은 아니니까 그래픽이 보기만해도 감탄이 나오고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게임화면을 확대해보면 디테일이 상당합니다. 보병들 하나하나까지 한땀한땀 잘 깎아놨어요. GDF 저격수는 꽤나 이쁘장하기까지 하더군요. 사운드는 어디 빠지는 부분 없습니다. 그리고 음악이 아주 끝내줍니다. 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의 원조 작곡가였던 프랭크 클리페키가 참여했다는데(총괄 제작 같은 건 아닙니다. 몇 곡만 작업했더군요) 그가 만든 곡을 제하고서라도 인상깊은 음악들이 상당합니다. 타이베리안 던 같기도 하고 레드얼럿 같기도 하고. 몇몇 곡들은 타이베리안 선 감성도 느껴지고. 종합 선물세트 같은 사운드트랙이었습니다. 캠페인은 진영 당 미션 11개, 총 22개 구성입니다. 보통 난이도 기준으로 팩션 당 6~7시간 정도. 숙련자 기준 12시간이면 클리어 가능한 수준이니 아주 넉넉하다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다만 최고 난이도는 아주 살벌한 모양이더군요. 스토리는 C&C 시리즈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다소 뻔한 내용이고, 케인 같은 시리즈를 이끌어나갈 만한 카리스마적 캐릭터가 없어서 그다지 인상적이진 않았습니다. 앞으로 시퀄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노골적으로 암시하곤 있지만) 도입부 같은 내용에 제3진영이 바로 등장한다는 점에선 C&C: TD와 C&C3을 다소 섞은 듯한 전개라고 할 수 있겠군요. 개발기간이 꽤 긴 게임이었던 덕인지 게임의 폴리싱이 상당한 수준입니다. 게임하는 내내 딱 하나의 버그만 접했는데(시야가 확대된 상태로 게임이 시작되어서 돌아오지 않는), 큰 지장은 없었습니다. 한국 유저로써 아쉬운 번역 퀄리티가 다소간 신경쓰입니다. 약간의 오역이 있고, 고유명사의 번역이 매끄럽지 않으며 캐릭터가 존댓말과 반말을 왔다갔다하는 등 스크립트만 보고 번역했을 때 생기는 전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이는 유저 한국어 패치로 다소 해결된 사항이지만 기왕이면 공식적으로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멀티플레이는 아직까지 다듬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매치메이킹이 잘 안 잡힙니다. 로비에서 핑이 9999로 보이는 문제도 있고요. 랭킹매치는 현재 무조건 1:1로만 진행되고, 빠른대전 또한 팀큐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사후지원이 언제까지 이뤄질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3번째 팩션인 베티가 추가 예정이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정말 재미있게 플레이한 게임이지만 역시 물에서 건져내면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고 저도 약간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일단 춫 시리즈의 상징인 끝내주는 슈퍼무기! 이 게임은 이온캐논이나 핵미사일이 없지요. 템페스트라는 자원을 요렇게 저렇게 살살 만져서 폭탄도 만들고 미사일도 만들어서 그걸 던지고 쏜다곤 하는데, 아무래도 옛날의 뽕맛이 안 납니다. 많이 심심해요. DLC나 차기작에서 꼭 내줬으면 하고요. 그리고 케인의 분노에서 나왔던 에픽 유닛 같은 것도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혹은 특징이 넘치는 서브팩션이라던가. 인게임에 헌터 전차가 레이저 쏘는거 보면 서브 팩션 생각이 아주 없는 것 같진 않은데…? 총평 이 게임은 좋았던 옛 시절에 대한 끝내주는 헌사입니다. 완벽하진 않을지라도, 이 장르에 애정이 많은 사람들이 만들었다는게 게임하는 내내 느껴집니다. 타이베리안 던 코만도 미션 같은 묘수풀이 캠페인부터 C&C3 최종미션 같은 비장미 있는 전면전까지, 달려오는 엔지니어를 피해 건물을 팔아버리고 하베스터를 털어버리려 경차량들을 기동시키는 멀티플레이의 맛까지. 한동안 잊어버렸던 추억들이 되살아나는 경험이 정말로 즐거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까지 잘 나올거라고 기대한 게임은 아니었습니다. C&C류 RTS를 찾아 헤매는 사람으로써 기대가 늘상 배신당해왔기 때문이지요. 사멸해가는 장르이고, 큰 판매량을 기대할 수 없다보니 예전 C&C 타이베리움 워 수준으로 공을 많이 들인 게임은 다신 나오지 않을 거라고 반쯤 체념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역시 세상은 넓고, 향수에 젖어있던 사람은 나만 있던 건 아닌 모양입니다. 없으면 내가 만들지 정신으로 덤벼든 덴마크 개발사가 지난한 개발의 역사 동안 퍼블리셔를 바꿔가며 고초를 겪은 끝에 큰 일을 치러낸 것에 경의를 표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