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 존재는 무엇일까?
스포일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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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임은 태세우스의 배 역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아테네인들은 아테네의 영웅 태세우스가 타고 왔던 배를 보관하였다. 그리고 배가 낡기 시작하자 낡은 부품들을 새로운 부품으로 교체하였다. 부품을 교체하더라도 그 배는 여전히 태세우스의 배일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배의 낡은 부품을 모두 교체하여 기존의 태세우스의 배의 부품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전부 새로운 부품들이라면 그것을 태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정신과 자아가 인간이라 하더라도 나의 신체가 인간이 아니라면 나는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살아갈 수만 있다면 나의 신체가 어떤 형태여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비록 나의 몸이 사이버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이터 조각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ARK 프로젝트는 후자를 선택한 사람들에 의해 실행된다. 사이먼은 현실을 부정하지만 결국 캐서린을 따른다. 어떤 선택이든 지금 상황보단 나을테니 말이다. 그는 자신이 우주를 배회하는 데이터 조각이 된다해도 ARK 세상에서의 나를 인간이라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사이먼A(플레이어)는 강화 잠수복으로 정신을 옮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 정신을 옮기는 것이 아닌 사이먼을 복제하여 강화 잠수복으로 옮기는 것이였다. 사이먼A는 강화 잠수복으로 성공적으로 옮겨지지만 기존 신체에 있던 사이먼B는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사이먼A는 자신이 동전던지기 에서 이겼기 때문에 강화 잠수복에서 눈을 뜬 것이지, 만약 졌다면 기존 신체에서 죽어갈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경악하게 된다.
그렇다면 기존 신체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이먼B는 진짜 사이먼이 아닌걸까? 사실 캐서린의 입장에서 그런것은 중요하지 않다. 동전던지기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강화 잠수복에서 눈을 뜬 것이 사이먼A든 사이먼B든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한 쪽은 기존 신체에서 죽어갈 사이먼, 한 쪽은 강화 잠수복에서 눈을 뜰 사이먼, 그것이 전부다. 사실 강화 잠수복에서 눈을 뜬 것이 사이먼A인지 사이먼B인지 조차 알 수 없다. 플레이어는 사이먼A의 시점에서 플레이를 하기 때문에 사이먼A가 기존 신체에서 강화 잠수복으로 옮겨갔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강화 잠수복에서 눈을 뜬 것이 사실은 사이먼B이고 우리가 그동안 플레이했던 사이먼A는 기존 신체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면?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아니 사실은 사이먼A와 사이먼B 조차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기존 신체에서 죽어가는 사이먼, 강화 잠수복에서 눈을 뜬 사이먼 뿐이다. 둘은 다른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사이먼의 입장에선 다르다. 그에겐 동전던지기란 분명 존재한다. ARK에서 눈을 뜬 사이먼은 자신이 동전던지기에서 이겼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이먼은 동전던지기에서 졌다고 생각하고 좌절할 것이다. 각자 자신의 시점에서 자신이 진짜 인간 사이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ARK에 가지 못한 캐서린은 이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녀는 ARK에 탑승하지 못했지만, 동시에 성공적으로 탑승했다. 어차피 그녀에게 있어서 동전던지기에서 진 캐서린과 이긴 캐서린은 같은 캐서린이기 때문이다.
이 게임은 공포장르로서 손에 꼽을 만한 수작이다. 미지의 존재로부터 쫒기고 살아남는 것은 마치 에일리언 아이솔레이션이 생각나기도 한다. ARK 프로젝트는 영화 매트릭스가 생각나기도 한다. 인류는 파란약을 먹어서라도 존속을 이어나가려 한다. 그리고 매트릭스의 세상에서 사는 나 역시 인간이라 생각한다. 이 게임은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깊은 철학적 메세지를 남긴다. 어쩌면 미지에 대한 공포보다 나라는 존재를 상실하는 것이 더 큰 공포일지 모른다.
+추가
그렇다면 아크 프로젝트는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을까?
인류는 이미 멸망하였다. 문명의 발전은 멈추었고 그 흔적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아니 어쩌면 역사에 남지도 않고 사라질 수도 있다. 먼 훗날 태양이 수명을 다하고 적색거성의 단계가 된다면 지구는 원자 단위로 분해되어 형태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혹은 거대한 천체와 충돌하거나 블랙홀과 같은 아주 무거운 천체의 영향으로 산산조각이 난다면 인류의 역사는 소멸될 것이다. 우리는 과거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은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캐서린은 왜 아크 프로젝트에 집착했을까? 철학적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소리가 나는가?" 인류가 멸망하고 그 누구도 인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인류가 쌓아 올린 수만 년의 역사는 우주의 긴 시간 속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아크라는 물리적 실체가 존재한다면 인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그것이 비록 데이터 조각일지라도 인류라는 생명체의 존재가 담겨 있는 것이다.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도서관과 같다. 비록 아무도 읽지 않아 낡고 먼지 쌓인 책일지라도 책장에 꽂혀 있는 것 만으로도 도서관의 가치 달라진다. 캐서린에게 있어서 아크는 단순히 죽음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인류라는 종의 정수를 보존하여 우주라는 거대한 도서관에 꽂아두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먼 훗날 누군가 그 책을 펼쳤을 때 그들의 관측을 통해 인류는 다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아크 프로젝트는 흔적이 주는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셈이다. 누군가에겐 데이터 조각이 되어서라도 살아남겠다는 비참한 발버둥처럼 보이겠지만 인류에겐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은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한 마지막 메세지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