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너무 재미있어서 2주동안만 방 안에 틀어박혀서 이것만 했다! 나는 특히 아무도 안 궁금해할 것 같은 자잘한 세계관 설정을 제일 궁금해하는 사람이라 더욱 취향에 맞았던 것 같다. 고작 게임 9n시간 좀 했다고 갑자기 현실의 숨겨진 구조를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특정부류의 젊은이처럼 굴고 싶진 않은데, 그런다한들 별 수 있겠나. 어쨌든 이 게임이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했고 정말로 듣고 싶었던 말을 해줬다는 것은 사실이다. 주인공은 기억을 잃은 채 깨어나지만 그 망각은 새 삶을 다시 시작할 이유가 되어주지 못한다. 과거가 지워진 자리에는 사무치게 외로운 공백만이 남았기에 그는 그 공백 위에 새 이름을 쌓아간다. 딕 멀렌, 데킬라 선셋, 라파엘 암브로시우스 코스토... 좀 우스꽝스러우면 어떤가. 내가 살아낸 적도 없는 나의 기억을 끌어안고 사는 것보단 나을텐데. 이 게임이 정말 좋은 점은 인간이 회복하는 과정을 낭만적으로 포장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다 괜찮아질거라는 허황된 믿음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일어서려고 하는 순간조차 수치와 후회를 끌고 오게 만든다. 주인공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동시에 밑도 끝도 없이 추해질 수 있으며, 그가 어느 이름을 택하든 그가 지나온 삶은 증발하지 않는다. 버렸다고 믿은 과거는 이미 그의 말투와 습관과 망가진 신경계 안에 남아 있다. 이 지독하게 비참한 현실이 게임을 하는 나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허둥대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얼핏 나 자신을 겹쳐볼 수 있었기 때문일까. 이 작품은 과거에게 발목잡히지 않을까 두려워 시도조차 못하는 나의 등을 떠민다. 완전히 새로 태어나지 못해도 삶은 계속될 수 있다고. 과거를 없애지 못해도 그 과거를 지닌 채 다음 아침으로 걸어갈 수 있다고.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질문 앞에서 새로 지은 이름은 더 이상 방패가 되어주지 못한다.






